온라인홀덤 비늘 대신 뽀얀 피부가 드러난다. “인간 맞아요. 방금 그건 용체화라고 제 선천 능……. 아니, 시그니처라고 보면 됩니다.”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안광이 진정되자 데스나이트는 검을 검집으로 집어넣었다. -응. 확인. “잠깐만요!” 데스나이트가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리자 시우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. -왜? “혹시…… 이즈샤, 맞아요?” 화아아악! 그 말에 검집에 들어있던 검이 순식간에 뽑힌다. 그와 함께 공허와는 또 다른 거부감이 드는 회백색 기운이 시우의 주위로 포진했다. -너…… 누구. 경계 어린 그녀의 안광에 대답하는 대신, 시우는 사안을 활성화했다. 아마 아까의 용체화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을 터. -어? 그 눈. “다행히 잘 찾아온 모양이네요.” 회색의 기운이 느슨해지자 시우는 미소를 지었다. * * * [그만 죽으란 말이야!]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붉은 앞발이 내리꽂힌다. 콰아앙! 온라인홀덤 배리어를 짓이기던 앞발은 다시 한 번 높게 들려 올라갔다. [가로지르는 여명.] 그와 함께 레드 드래곤치고 그리 크지 않은 그녀의 곁에서 4개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. 피잉! 극도로 응축된 화기가 붉은 레이저로 쏘아진다. 푸른 보호막을 녹일 듯 일점사 된 4개의 광선. 이어서 앞발이 파고들자 버티고 버티던 마나 배리어는 결국 부서졌다. “커헉!” 허연 수염 위로 붉은 핏물이 튀어 오른다. 배리어가 파괴된 여파로 멀리 날아오른 노구가 힘없이 바닥에 처박혔다. [정말 짜증 나 죽겠어. 크루망디 언니한테 큰소리 떵떵 쳤는데!] 크리메라는 잔뜩 성이나 피어를 줄줄 흘려댔다. 그도 그럴 것이 마탑이 자랑하는 비전 성채는 공모전의 토너먼트에서도 쓰인 최고의 배리어. 아르스의 방어벽을 토대로 만들어진 대마법 방어 기재였다. 용 군단 중 수위를 다투는 1용제의 용 군단이 고전할 정도로 마탑의 비전 성채는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자랑했다. 아마 로브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뚫지 못한 채 브레스만 주야장천 뿜어대고 있었을 터. [언니 말이 맞았어. 아무리 늙은 벌레라 해도 넌 무시할 만한 녀석이 아니야.] 혹시 모를 빈틈을 위해 마력을 은밀하게 끌어올리던 마탑주 토린 마나메인. 그는 진심이 담긴 크리메라의 눈빛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.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, 현재 상황에선 오히려 독이었다. [시간의 신도 죽어버린 마당에 시간 마법을 사용하다니? 어째서 그런 축복이 고작 늙은 인간에게 내려졌는지 모르겠다니까.] 그렇다 하여 순순히 죽어줄 수도 없는 일. 토린은 은밀하게 운영하던 마력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며 타고난 선천 능력에 몸을 맡겼다. 시그니처(Signature). 정지(Stop). [또 무…….] 황급히 말을 잇는 크리메라의 입이, 그리고 전신이 멈춘다. “쿠, 쿨럭. 비전 격류!” 지이이잉! 기묘한 이명과 함께 토린의 손끝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. 이내 중심부가 힘차게 일렁이며 연청색의 광선을 토해낸다. [꼬꼭. 위험!] 멈춰버린 크리메라의 심장을 향해 쏘아지는 광선. 그것을 가로막은 닭 머리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난다. 힘차게 쏘아지던 8서클의 마법은 그 수준과 달리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졌다. “으음. 또…….” 토린이 짧게 탄식한다. 간신히 부여잡던 시간의 끈을 놓치자 정지했던 크리메라가 화들짝 놀라 움직였다. [이, 이게 또! 날 가지고 놀아?] 드래곤답게 자신의 앞에 있는 3군단장의 모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크리메라가 소리쳤다. [부서져라!] 뚜두둑. 피를 토하던 토린의 팔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부서진다. 그러나 이를 악문 백발의 노인은 신음 한번 내지 않고 쓰려졌다. [지독한 늙은이. 아직도 모르겠니?] 그런 토린을 질린 듯 바라본 크리메라가 말했다. [코카트리스는 너희 마법사들의 천적이야. 마법은 답도 없다고!] 새침한 소녀처럼 눈을 흘긴 그녀는 제3 군단장 카루크를 보며 말했다. [카루크, 여긴 아예 끝났으니까 넌 가서 남은 벌레들을 쓸어버려.] [꼬꼭!] 비늘 덮인 기다란 꼬리로 경례한 카루크가 자리를 뜬다. 크리메라는 현신을 해제하고 토린의 앞으로 내려왔다. “인정할게. 언니한테 네가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 하나하나 읊어주겠어.” 고소한 표정을 짓던 소녀는 사박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. 그곳에는 다 찢어진 로브를 걸치고 있는 무표정한 남자가 서 있었다. 그리고 그런 그를 본 토린이 몸을 움찔거리자 소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. “아, 놀랐지? 절대자라 불리던 인류의 영웅이……. 용족의 노예가 되어서 뒤통수를 쳤다는 게.” 교소를 터뜨린 크리메라가 토린의 머리를 밟았다. “어쩌겠어. 기만책만큼 인간들에게 효율적인 건 없는데. 결국 그 비전 성챈지 뭔지 하는 코어를 저 녀석이 반파시켜준 덕분에 일이 아주 쉽게 풀렸잖아? 히힛.” 키득거리는 소녀의 다리에 거력이 실린다. “이곳은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박살 낼 테니 미련은 남기지 마? 그럼 잘 가, 빌어먹을 늙은이.” 콰직.